최근 연차를 내고 은행을 찾은 직장인 A씨는 부모님께 드릴 현금을 인출하러 은행에 갔다가 황당한 얘길 들었다. 빳빳한 새 5만원권을 봉투에 담아 부모님과 장인장모께 드리려고 은행을 찾았지만, 새 돈은 커녕 5만원권 자체가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언제 찾아오면 5만원권을 받아갈 수 있나"는 질문에 은행 직원은 "저희 지점 말고 다른 지점을 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5만원권을 찾는 분은 많은데 확보가 쉽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넉넉해야할 한가위에 때 아닌 `5만원권 가움`이 벌어졌다. 한은은 평년보다 5만원권 공급을 늘렸지만 장기간 이어져 온 5만원권 품귀현상이 코로나19와 추석을 맞아 더 심해졌다.
한국은행은 올해 더 많은 5만원권을 찍어냈지만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올해 1월부터 8월 사이 한은이 찍어낸 5만원권은 16조6000억원 어치에 달한다. 지난해 찍어낸 16조3000억원보다 더 많은 양이다. 그런데도 품귀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낮은 환수율로 확인된다. 발행한 화폐가 한은으로 돌아온 비율인 환수율을 분석해보면, 5만원권의 환수율은 올해 3월부터 8월 사이 20.9%에 불과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60.1%였던 점을 감안하면 장롱이나 금고로 들어간 5만원권이 다시 나오지 않은 비율이 급증했다는 의미다.
시중에서 5만원권이 돌지 않는 이유로는 코로나로 인한 소비 위축과 저금리가 지목된다. 우선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음에 따라 대면 소비가 줄고, 이에 따라 `대면 소비 중심 서비스업→시중은행→한은`으로 이어지는 화폐 환수고리가 약해졌다는 것이다. 여기 더해 역대 최저 금리 영향으로 은행에 돈을 맡기는 사람도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29일 한은이 발표한 8월 시중은행 정기예금 금리는 0.81%다. 100만원을 1년동안 은행에 맡겨봐야 8100원의 이자밖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몇 푼 되지 않는 이자 받자고 돈을 맡기러 가느니, 코로나19로 언제 현금상황이 위축될지 모르니 현금을 들고 있는 사람이 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코로나와 저금리는 전 세계 공통 현상인데도 한국의 5만원권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유난히 환수율이 낮다. 미국이나 유럽을 보면 최고액권인 100달러권과 500유로권의 환수율은 각각 70%, 90%를 항상 웃돌고 있다. 반면 5만원권의 환수율은 2009년 첫 발행 이후 올 7월까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49.1%로 집계되고 있다. 주요국과 비교해서도 한국의 최고액권이 유난히 돌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5만원권이 탈세 수단으로 전락할 우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난 달 3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대지 국세청장은 "고액화폐 수요 증가 원인은 저금리 기조도 있지만, 탈세의 목적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금융정보분석원의 여러 분석 자료, 현금 영수증 등의 정보 수집을 강화해 현금 거래에 대해 엄정하게 대처하겠다"고 말해 탈세 가능성을 우려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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